컬럼 - 피카소의 <게르니카>
대학생 때 이 그림을 처음 보고 감격했던 기억이 난다. 피카소(Pablo Picasso : 1881-1973)는 큐비즘을 이끌고, 전 생애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변화시키고, 그럴 때 마다 부인도 바꾸었으니, 그는 도덕이나 사회정의보다 예술이 우선인 사람인줄 알았다. 예술가는 사회와 서로 대치관계에 있어서 사회적인 도덕심을 갖은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기였을 것이다. 1937년 초 스페인 공화정은 그 해 여름 개최예정인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위해 피카소에게 작품을 의뢰하였다. 게르니카(Guernica)는 스페인의 북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 이름이다. 이제 이 사건이 촉발시킨 피카소의 그림을 보자. 그러나 피카소가 이 그림에 폭격기나 파괴된 마을을 그리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애초부터 게르니카의 폭격사건을 그대로 그리기 보다는 이를 통해 인간의 동물적인 공격성과 힘이 없는 약자들의 절규에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 폭력성은 피카소 자신에게도 있었던 감정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1935년 올가와 이혼하고 마리 테레즈를 만났으며, 36년엔 마리 테레즈가 아기를 낳았음에도 새 연인 도라를 끌어들이고, 이 둘의 싸움을 가학적으로 즐겼다는 피카소, 그리고 도라로 하여금 그토록 우는 여인으로 만든 피카소이기 때문이다. 다시 그림을 마주하였을 때 신기한 점은 싸우고, 쓰러지고, 절규하는 극도의 표현성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이 우리를 흥분 상태로 몰아넣지만은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설명 피카소, <게르니카>, 1937, 캔버스에 유채, 782 x 351cm, 마드리드, 국립 레이나 소피아박물관 소장
Spanish Civil War
The war began after a pronunciamiento (declaration of opposition) by a group of generals of the Spanish Republican Armed Forces, under the leadership of José Sanjurjo, against the elected government of the Second Spanish Republic, at the time under the leadership of President Manuel Azaña. The rebel coup was supported by a number of conservative groups, including the Spanish Confederation of the Autonomous Right,[nb 3] monarchists such as the religious conservative Carlists, and the Fascist Falange.[nb 4][5] The coup was supported by military units in Morocco, Pamplona, Burgos, Valladolid, Cádiz, Cordova, and Seville. However, rebelling units in important cities—such as Madrid, Barcelona, Valencia, Bilbao, and Málaga—were unable to capture their objectives, and those cities remained in control of the government. The Nationalists advanced from their strongholds in the south and west, capturing most of Spain's northern coastline in 1937. Background[edit] Military coup[edit] Outcome[edit]
Mary I of England
Mary I (18 February 1516 – 17 November 1558) was Queen of England and Ireland from July 1553 until her death. Her executions of Protestants caused her opponents to give her the sobriquet "Bloody Mary". She was the only child of Henry VIII and his first wife Catherine of Aragon who survived to adulthood. Her younger half-brother, Edward VI, succeeded Henry in 1547. When Edward became mortally ill in 1553, he attempted to remove Mary from the line of succession because of religious differences. On his death their first cousin once removed, Lady Jane Grey, was initially proclaimed queen. As the fourth crowned monarch of the Tudor dynasty, Mary is remembered for her restoration of Roman Catholicism after the short-lived Protestant reign of her half-brother. Birth and family[edit] Education and marriage plans[edit] Mary at the time of her engagement to Charles V. Throughout Mary's childhood, Henry negotiated potential future marriages for her. Adolescence[edit] Adulthood[edit] Mary in 1544
베트남 전쟁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운 북베트남이 독립의 쟁취를 위해 프랑스와 치른 제1차 전쟁, 미국의 비호를 받는 남베트남과 치른 제2차 전쟁으로 구분되며 제2차 전쟁부터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전장이 되어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미토의 피난민베트남 전쟁의 피난민. 왼쪽에 M-113 장갑차가 보인다. 베트남전쟁은 '30년전쟁'이라고도 부르며 2차 전쟁으로 구분한다. 1차 전쟁은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며 1946~1956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와 프랑스간에 일어난 전쟁을 말하며, 2차 전쟁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며 1960~1975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와 미국간에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1,2차에 일어난 전쟁을 통틀어 베트남전쟁 또는 30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19세기에 들어와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으며 캄보디아, 라오스와 함께 인도차이나(Indochina)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불리게 되었다. 1946년 말 하이퐁 항구에서 베트민과 프랑스와의 직접적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전쟁이후 중국과 소련은 공산세력의 확대를 희망하며 베트민에게 1956년에 실시될 베트남 남북총선 이전까지 위도 17도선을 기점으로 국경을 분할 할 것을 요구했고, 미국과의 전면적인 확전을 우려하는 소련과 중국의 압력으로 이를 받아 들였다. 한편 남베트남에서는 미국의 후원을 받아 응오 딘 디엠(Ngo Dinh Diem)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이 1955년 건국되었다. 베트남전쟁의 제2막은 노동당을 중심으로 응오 딘 디엠 정권에 대항하고, 베트남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제네바협정에서 약속한 통일선거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1963년 사이공에서는 불교도들의 시위와 분신자살이 발생했고, 미국도 디엠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인가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11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디엠 대통령이 암살되고 인해 남베트남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운 국면으로 치닫게 되었다.